반드시 기업을 일으키고, 나라를 다스려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척박한 땅을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는 것 그 못지 않게 가치 있는 일이다.
천리포 수목원을 만든 민병갈 원장이 바로 그런 분이다. 여지껏 보았던 어떤 수목원보다 아름답고 자연스런 곳이다. "진정 이것이 인간이 만든 것이 맞습니까?"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곳이 이곳이다.
충남 태안반도 끝자락에는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가 이어져 있다. 이중 만리포 해변이 가장 유명하지만 천리포 또한 그 못지 않게 유명하다. 바로 천리포 수목원이 있기 때문이다. 천리포 수목원은 한국인으로 1979년에 귀화한 민병갈(미국 이름은 Carl Ferris Miller)씨가 1962년에 인근 토지를 매입한 후 나무를 심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평소 만리포 해변을 좋아했던 민병갈씨는 1962년 해변을 걷다가 그 지역에 사는 한 노인이 다가와 시집가는 딸의 혼수비용을 마련해야 한다며 땅을 사달라는 끈질긴 요청을 이기지 못하고 그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땅을 외국인에게 팔았다는 소문이 나자 그 지역의 다른 주민들도 자신의 땅도 사달라고 요청하고 그러면서 얼떨결에 민병갈씨는 그 동네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 후 1970년부터 해안별장을 짓고, 현지에 적응 가능한 식물들을 지속적으로 수집 관리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수목원의 시초이다.
그는 운영자금을 대기 위해 한국은행에 다니고, 증권회사 고문역을 했으며 여기서 번 돈을 아껴 수목원에 지속적으로 투자를 했다. 그리하여 2000년에는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의 인증이다. 이 수목원에는 여러 수종이 많지만 그 중 마그놀리아(magnolia)라 불리우는 목련과 호랑가시가 대표 수종이다.
그는 진정으로 나무를 사랑한 사람이다. 무슨 대단한 목적을 갖고 이 일을 했다기 보다는 얼떨결에 땅을 사게 되었고 나무를 하나하나 심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나무 사랑의 첫걸음은 바로 관심을 갖는 거예요. 그 하나하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꽃이 언제 피는지, 열매는 어떤 모습인지, 오늘은 어제보다 키가 얼마나 컸는지, 어디 아프거나 목이 마른 것은 아닌지 배려하는 마음은 그 다음 단계죠. 자연이 겪고 있는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자격이 없어요." 그의 말이다.
18만평에 이르는 천리포 수목원은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나무를 위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에 어려움은 겪고 있지만 함부로 사람을 받지 않는다. 나무를 지켜줄 뿐 나무의 주인 노릇을 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를 위한다는 핑계로 몸통에 영양주사를 놓고, 해충을 없앤다고 살충제를 쓰는 것은 생각도 못한다.
다른 수목원처럼 나무를 예쁘게 키우기 위해 가지를 치고 잎을 다듬고 더 좋은 곳으로 옮겨 심을 수도 없다. 나무를 최대한 나무답게 놔두는 것, 자연을 자연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 덕분에 천리포 수목원은 정말 자연스럽다.
그는 장기적인 비전과 인내심의 소유자였다. 그저 일신상의 편안함과 단기성과를 노렸다면 절대 이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은 길어야 백 년이지만 나무는 천 년까지 삽니다. 나는 적어도 3백 년은 내다보고 수목원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도 자식처럼 키운 천리포 나무들은 몇 백 년 더 살며 내가 제 2의 조국으로 삼은 한국에 바친 마지막 선물로 남기를 바랍니다. 내가 평생을 통해 나무를 가꾸면서 깨달은 것은 수목원 사업은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것입니다."
나무를 키우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씨앗을 얻으려면 열매가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씨앗이 싹을 틔우기까지는 또 몇 날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 나무는 오랫동안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야 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는 정말 사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증권전문가로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개인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사용하지 않았고 그 돈을 온전히 수목원을 만들고 운영하는데 사용했다. 또 남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넉넉했으나, 본인 스스로에게는 매우 인색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는데 말년까지 그가 타고 다닌 승용차는 출고된 지 15년이나 되는 대우 브로엄이었고, 그 전에 탔던 일제 도요타 승용차는 24년간 엔진이 멈출 때까지 타고 다녔다.
그는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여 주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놀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남은 시간을 평상시처럼 보내고 싶어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증권사에 정시 출근하여 일을 하고, 주말에는 수목원에서 보냈다.
암 진단을 받은 후 1년 3개월 동안 그는 이런 투병 자세를 끝까지 지켰다. 임종 나흘 전까지 기저귀를 찬 몸으로 출근길에 올라 가정부 아주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자유를 꿈꾸었고 자유롭게 살다 갔다. "나를 묶지마" 그가 산소마스크와 링겔 줄로 감겨 있던 몸을 뜯어내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 단기적인 즐거움보다는 몇 백 년 후를 생각해 나무를 키운 사람, 수목원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쳤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 살기도 잘 살았지만 죽기도 잘 죽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민병갈 원장이다. 그는 정말 본받고 싶은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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